송암 박두성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평생 박애주의를 실천하며 살았다. 특히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칭송 받기까지 한글점자 창안 및 교육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교육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그는 한학에서부터 사범교육, 해부, 침술, 일본 점자 등 배움에 적극적이었다. 일찍이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이후 시각장애인교육에 헌신했다.


“세상은 진보하여 그치지 아니하매 예 사람이 오늘 형편을 짐작하지 못한 것과 같이 오늘에 또한 내일의 문명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만치 사람의 지혜는 발달되어 간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남 배우는 것을 배우고 남 아는 것을 알고 남과 같이 살아야 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보다 더 배우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벌어서 더 영광스럽게 살아야 할 것이다. (후략)”                                                                       - 박두성의 <맹사일지>에서 -


송암은 시각장애인들의 생활도 배움을 통해 길이 열릴 것이라 믿었다. 그는 교육에 대한 신념과 시각장애인에 대한 끈기 있는 애정으로 명분보다는 실리적인 현실대처 방법을 지킨 인물로 한글점자‘훈맹정음’의 창안이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유년시절의 송암

송암 박두성은 1888년 4월 26일(음 3월 16일) 인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에서 박기만의 6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두현(斗鉉)이었으나 민적(民籍)이 잘못되어 두성(斗星)으로 부르게 되었다. 7세부터 동생과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맹자 등의 한학을 익혔다. 8세가 되던 1895년 소학령이 공포됨에 따라 많은 선각자들이 전국에 학교를 세웠다. 두성은 구한말 무관 출신인 성재 이동휘(李東輝)가 세운 보창학교에서 보통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12세부터 고향에서 농사일을 돕던 가운데 1901년 극심한 흉년으로 일본 오사카로 돈벌이를 떠나 일본 상점에서 두 달간 점원생활을 하였다. 두성은 일본인의 상업적 기질과 맞지 않는데다 눈병까지 걸려 곧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신교육에 눈을 뜨게 된 두성은 향학열에 불탔으며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며 미래를 준비하였다.


교육자로서의 송암

아버지는 16세가 된 두성을 고씨 집안 딸과 결혼시켜 고향에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성은 “국권회복의 장래는 국민교육을 장려하여 문맹을 퇴치하는데 있다. 너는 우선 사범교육을 받고 교육의 선봉에 나서라”는 성재 이동휘의 권유로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06년 1기생으로 졸업한 두성은 어의동 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훈도(訓導)로 발령을 받아 교육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3세가 되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동휘가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와 두성에게 북만주로 망명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자신의 교육에 대한 소신을 밝히며 거절했다. 그러자 성재는‘자네는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않도록 송암(松庵)이라 부르고 남이 하지 않는 사업에 평생을 바치게’라고 당부하였다. 당시 일제의 황국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훈도의 위상을 높이고 사상교육을 강화했으나 송암은 그와 상관없이 독서에 힘쓰며 한글점자 창안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제생원 맹아부와의 인연

1912년 일본 천황 무쯔히도가 서거하고 그의 아들 요시히도가 왕위에 오르면서 즉위기념으로 제생원 관제를 제정하였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경성제생원 맹아부를 설립하였고 박두성은 맹아부 훈도로 이직하게 된다. 이것이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의 시작이었다. 제생원 맹아부(현 서울맹아학교 전신)의 유일한 조선인 교사로 근무를 시작한 송암은 일본 점자제판과 인쇄술을 익혀 원판을 제작하고 지방에 학생을 모으러 다니는 등 분주한 일상을 보내게 된다. 30세가 되던 1917년에는 성서학원 출신 김경내와 결혼하여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이후 1921년 송암은 제생원 맹아부 졸업생 80여명이‘조선맹아협회’를 만드는 일을 돕고, 1922년 사감으로 취임하면서‘곡식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자라고 맹아는 안내자의 사랑으로 자란다’는 신념으로 맹아들과 동거 동락하였다.


한글 점자의 창안과 보급

“세상에 눈으로 보고 하는 일이 많지마는 눈으로 보아야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도리어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틀림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한글점자 창안으로 드러났다. 제생원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만나 교육하기 시작한 1913년부터 일본어점자, 천자문 점역 등을 연구하고, 1920년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연구에 몰입하여 당시 평양에서 활동 중이던 로제타 홀의 4점형을 한글 3ㆍ2점식 점자로 개발하게 되었다. 1926년 오랜 노력 끝에 한글점자를 창안하고 11월 4일 ‘훈맹정음’ 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하였다. 박두성은 점자를 개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각장애인들에게 실제로 보급하기 위해 통신교육과 강습회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점자 연구와 보급 노력은 심한 안질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1931년 제생원 맹아부 서리를 맡았는데 48세로 퇴직할 때까지 한글점자의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그의 노력으로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다른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한글 교육이 제생원 맹아부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1935년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선거에서 한글점자 투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박두성은 제생원 퇴임 후 1936년부터 40년까지는 인천 영화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끝없는 맹아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1940년 이후‘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단체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통신교육과 도서점역, 인천 시각장애인 주간소식 회람지「촉불」을 발간했다. 1933년부터 41년까지 신약성경의 점역을 완성하였고, 1950년 이후 부산에서의 피난생활 중에도 실명 부상장병들의 재활교육에 헌신하였다. 1953년부터는 구약성경과 6.25 전쟁으로 불타버린 신약성서를 점역하여 시각장애인들의 기독교 교화운동에 몰두하였다. 송암의 한글점자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1962년 8월 15일 당시 국가 재건 최고위원인 박정희로부터 국민훈장(당시 문화포장)을 받게 하였다. 이는 ‘캄캄한 맹인들의 세계에 광원이 되어준 송암의 노고를 치하’ 한 것이다. 41세 고관절염으로, 68세 이후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점자 교육을 쉬지 않았던 송암은 타개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점자책은 세워놓으라’ 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송암은 1963년 8월 25일 생을 마치고 인천 수산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5년 한글점자 반포 39주년 기념일을 맞아 서울맹학교 교정에 송암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졌고, 1976년 그의 기일에 ‘송암추모기념사업회’ 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그 후로도 송암을 기리는 일은 계속되어 1997년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에 송암기념관이 마련되었다.